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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Road

호주 워킹홀리데이.

1)

하염없이 이력서를 두드리고 있는데 문득 호주 생각이 났다. 겨우 1년 전이었다. 작년 이맘때 시드니에서 혈혈단신 퍼스로 넘어온 난 미친듯이 이력서를 돌리고 있었다... 퍼스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곧장 시티에서 200Km 떨어진 (서호주 제2의 도시라는데 아마 끝에서부터가 아닐까 의심되는) 번버리라는 도시로 이동했다. 이쪽에 안정적인 일자리를 쉽게 얻을 수 있을 거란 말을 어디선가 들었고,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갔지만 며칠만에 헛된 희망이었단 걸 알았다. 



2)
자가 차량이 없으면 이동이 불가능한 동네였다. 버스 배차 시간은 짧으면 40분 재수 없으면 두시간에 한두대 꼴... 공장이라고 하는, 안정적인 벌이를 보장해 주는 곳들은 모두 시 외곽에 자리잡고 있었다. 일단 거기까지 갈 수가 없었다. 이력서를 내러 가기는커녕 차로 5~10분 거리의 마트도 갈 수가 없었다. 걍 계속 걷거나, 길가에서 히치하이킹을 하고 시내로 나가야 했다.

이틀 뒤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갔다. 시내 끝에서 집까지를 목표로 삼고 걸었다. 골목마다 'Job Agency' 'Recruitment' 'Job offer'라는 글귀가 적힌 오피스는 다 들어갔다. 시드니에서 인쇄해 온 이력서를 내며 일자리를 문의했다. 불행히도 작은 동네에 일자리는 별로 없었다. 그나마 기술을 요하는 자리들. 집주인은 아침부터 차도 없는 놈이 어디 갔나 싶었단다. 시내에서 걸어왔다고 하자 놀라던 게 기억난다... 내내 선크림을 바르며 움직였음에도 피부는 햇빛에 타버렸다. 속도 까맣게 타들어갔다. 첫 수가 악수였다. 힘들어도 큰 도시에서 일을 구했어야 했다. 결국 일주일만에 퍼스로 다시 돌아왔다. 나가기 2주 전 노티스였기에 보증금은 당연 돌려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미련없이 퍼스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 중 다른 하나는 온라인에 이력서를 뿌렸던 곳들 중 한곳에서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 그 때도, 지금도 그건 천운이 따랐다고 밖에는... Cottesloe Beach라는 해변가 호텔 레스토랑에서 키친핸드를 모집한다 했고 내가 보낸 e메일을 보고 전화했다 했다. 약속을 잡고, 번버리에서 하루에 두 번뿐인 퍼스행 열차를 타고 달려가 Trial을 마쳤다. 고용이 결정됐다. 돌아가기 전 퍼스에서 살 원룸을 찾아 계약하고, 남은 돈을 털어 1300불에 고물 승용차를 사서 타고 왔다.(나중 얘기지만 구매한지 정확히 한달만에 결국 폐차시킴... 기어 박스가 완전 맛이 가서) 처음 타보는 우측 핸들, 게다가 수동. 도로는 좌측 통행. 모든게 한국과는 거꾸로. 처음 악셀레이터를 밟았던 긴장감을 잊을 수 없다.

3) 
접시 닦고 주방 청소하고 마감 정리하고, 쉽게 말해 시키는건 다해야하는 주방 막내 잡일꾼이었다. 시급은 20달러였지만, Time Shift가 불안정했다. 몇시간전에 나와달라 연락이 오기도 했다. 한주 최다 40시간 근무가 가능했지만, 20시간이나 할 수 있음 다행이었다. 

방값 밥값은 낼 수 있어 한숨은 돌렸지만 그거 빼면 0이었다. 목표했던 여행 경비는 벌 수 없었다. 하루살이처럼 일했다. 호주서 했던 일들 중 육체적으로 가장 힘들었다. 호텔 레스토랑의 규모는 컸다. 주방은 바, 비스트로, 야외 홀 세개였고, 불행히 그 접시들을 닦을 워싱 머신은 단 하나였다. 저녁시간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하루 6~7시간 근무 중 앉아서 쉬는 때는 돌아가면서 쉬는 30분의 식사 시간 뿐. 접시는 닦아도 닦아도 끝이 없고, 스텝들의 쓰레기통 비워라 닦은 접시 채워놔라 헹주 쓴거 세탁기 돌려라 냉장고서 식자재좀 가져와라 끝없는 지시. 마감시간 업무는 지옥이었다. 끝나고 집에 가면 1시. 불만은 없었다 다만 힘들었다. 

4)
안정적인 일을 찾아야 했다. 일이 없는 날이면 시티 외곽 각종 Factory가 몰려 있는 지역으로 나가거나, 도심 식당가를 배회하기도 했다. 에이전시 방문은 기본이었다. 막상 얼굴을 들이밀려니 용기가 나지 않아 사무실에 도착하고도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하루에 채 두어곳만 갔을 때도 있었다. 막상 힘들게 맘먹고 들어가도 말도 채 못붙이고 쫓기듯 나올 때도 있었다. "헬로 암어 잡시커 앤 이즈데어..." "노 베이컨시, 노 잡 히얼. 굿바이" 쪽팔린건 둘째고 좌절만 늘었다.

조금씩 뻔뻔해지기 시작했다. 나 같은 외국인 구직자는 수백 수천이었다. 또 가도 어차피 모른다. 정기적으로 또 가봐야지 결심했다. 요령도 생겼다. 처음 들어가 길을 묻거나, 시덥잖은 눙도 치고 말문을 열다가 본색을 드러내기도 했다. 크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최소한 방문하는 숫자는 조금씩 늘었다.

온라인 지원은 동시에 진행되었다. 잠잘 때 일할 때 빼곤 늘 실시간 검색이었다. 검트리, 식닷컴, 옐로우잡 같은 구직 전문 사이트, 구글링으로 찾아낸 각종 에이전시 홈페이지들... 새로고침 새로고침 새로고침. 일단 빨리 이력서 내고 보는게 중요했다. 어차피 고만고만하다면 빨리라도 보내야지. 몇개나 보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셀수도 없다,

호주에서 일자리 구하는덴 인맥이 최고라고 했다. 일하는 애가 자기 관둘 때가 되거나 빈자리가 생기면 수퍼바이져에게 말해서 '아는 애'를 바로 꽂아준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서호주의 유일한 도시에서 나는 혼자였고, 할 수 있는 거라곤 계속 이력서를 넣고 넣고 또 넣는 것 뿐이었다. 커버 레터의 문구에 구라도 점점 늘어갔다. 해보지도 않은 일을 꽤나 다뤄본 나는, 이력서 상으로는 프로페셔널이었다. 미친 짓이었지만 그렇게라도 했어야 했다. 절박했다.. 그냥 밥값이나 근근히 벌다가 한국에 갈 수는 없었다.

5)
기회는 우연히 왔다. 검색 중 걸린 에이전시 홈페이지에 Factory Worker 구인글이 보였다. 날짜 기한은 없었다. E메일로 이력서 제출하라는 짧은 문구였다. 하지만 그거로는 부족했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홈피 보고 전화했음. 사람 구하는거 맞음?" 
"ㅇㅇ 이력서 전송하삼" 
"ㄴㄴ 직접 사무실로 가께 날아갈께 나 바로 일할 수 있음"
"ㅇㅋ 그럼 일단 오삼"
집에서 에이전시까지 40분 거리 도로를 30분 밑으로 주파했던 것 같다. 이력서를 내니, 뭘좀 적으란다. 적고 가려니 기다리란다. 기다리니, 면접을 본다. 언제 왔고 무슨 일을 했으며(여기서 뻥튀기가...) 요즘 일 구하고 있고 이러쿵저러쿵. 

그 날이 월요일인 걸 아직 기억한다. 왜냐면 면접을 본 임원이 사흘 후인 목요일 쯤에 연락주겠다고 했고, 실제로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 다음날부터, 워킹홀리데이 법률이 정한 6개월에서 일주일 모자란 기간을 그곳에서 일할수 있었다. 사용한 플라스틱 드럼통을 세척해서 내보내는 공장이었다. 고정된 업무 시간, 고정된 급여. 안정적인 적금이 가능했다. 그렇게 나는 두 달간 두가지 일을 병행했다. 아침 4시45분에 기상해서 집에 와 다시 누우면 새벽 1시. 고되었지만 분명 의미가 있었다. 7개월의 워킹을 종료했을 때, 나는 여행을 위한 넉넉한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펑펑 쓰고 왔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그 때 뽑은 인원은 총 셋이었다. 나보다 앞서 두명이 역시 나처럼 오피스에 왔다 갔고, 내가 마지막이었다는 것. 만약 전화를 안했다면, 그냥 메일만 보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사실 별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다만 참 절실했던 거, 하루하루 일없이 보낼 때 느꼈던 암담한 감정들 기억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운이 좋았던 것 같다..

6)
피하려 했지만 피할 수 없는 취업이란 관문이 앞에 있다... 어느 누구는 진즉 통과해서 자리를 잡기도 했고 또 누구는 한번에 통과하기 위해 칼을 갈기도 한다. 나는 일년 전 그때처럼 이력서를 만들고 있다. 영어가 아닌 우리말로 적고 있지만 솔직히 더 어렵다. 부족함을 느낀다. 잘될거야라는 확신은 지금이나 그 때나 없다. 다만 좀 더 쥐어짜는 심정이었다. 낭떠러지 끝길에 서 있는 기분은, 그랬다. 그 때 가졌던 절박했던 마음가짐이 다시 필요한 때인가... 그리고 그 때처럼 운도 좀... ^^ 

자려고 누웠다가... 잠이 안와 끄적여봄. 근데 뭐이리 길어졌어...



Posted on Facebook. Mar 16,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