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 :: 2012/12/25]
9시간 여에 걸친 비행 끝에 시드니 공항에 도착했다. 꿈적않고 앉아있던 탓에 몹시 피곤했다. 짐을 챙겨 나오니 한국, 필리핀과는 또 다른 냄새가 난다. 느끼함? 시큼털털함? 무언진 몰라도 그것이 시드니의 냄새임에는 분명했다. 잠을 깨기 위해 화장실에서 내리자마자 화장실로 직행, 찬물에 얼굴을 담갔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 입국심사대로 향했다. 잔뜩 지푸린 피곤한 표정의 입국심사요원이 나를 반겼다. 기내에서 작성한 출입국카드와 여권을 보여주었는데,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가 "머무를 곳을 적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을 때 아차 싶었다. 유학원에서 백팩커를 예약해주긴 했지만 그곳이 오래 머물 곳은 아니기에 굳이 적지 않았던 것인데. 사정을 이야기하니 어찌되었건 간에 머물 곳을 적으란다. 생각이 너무 많았나 싶었다. "give me a second"를 외치며 급히 메모해 둔 백팩커 주소를 적어넣었다.
Sydney Backpackers : 7 Wilmot st, Sydney, NSW 2000
적고 나니 군말없이 여권에 확인 도장을 찍어준다. 굳이 사증 뒤에다 혼자 덩그러니 찍었어야 했는지... 별거 아닌데 괜히 신경쓰이게 하시네 으흐. 앞에 순서대로 찍어놓은 것들이 있었던걸 보던데, 굳이 페이지를 뒤로 넘기더니 텅하고 찍는다 --; 호주에 대한 자부심인건가, 아님 내가 맘에 안들었나... 뭐 여튼지간에 여권에 찍힌 'IMMIGRATION AUSTRALIA'를 보니 아, 내가 정말 호주에 왔구나 싶은 느낌이었다.
입국심사대를 통과하니 바로 컨베이어 벨트가 나왔다. 나는 꽤 늦게 나온 축에 속해 당연히 모두 짐을 챙겨 나갔을 줄 알았는데, 여지껏 모두 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알고보니 캐리어 등의 승객 수하물이 아직 당도하지 않은 것이다. 일단 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에이전시에서 예약해 준 시티 픽업차량과 12시 15분에 만나기로 되어 있었는데 시간이 지체되는 걸 보니 초조했다. 누구 하나 아는 사람 없는데 벌써부터 미아가 되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결국 짐은 약 40분이 더 지나서야 컨베이어 벨트로 토해지듯 쏟아져 나왔고, 재빨리 가방을 찾아 출구로 향해야 했다.
휴대폰 개통이 안되었던 탓에 (당연히 되었을 리 없지! 방금 도착했는데!) 일단 받은 연락처를 휴대폰에 저장하고 카카오톡을 실행해 보았다. 공항에서 무료 와이파이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참 다행한 일이었다. 픽업 기사분이 카카오톡을 사용 중이었는지, 주소록과 자동 동기화가 되어 아이디가 등록되었고, 바로 보이스콜을 시도하여 기사분과 무사히 통화를 해서 출구대 옆 맥도날드에서 만날 수 있었다. 40대 후반 정도로 되어보이는 어르신이었다. 약 한시간 정도 기다렸다는 기사 분은 기다렸다는 듯 주차장으로 안내하며 예약된 백팩커로 향했다. 20여 분 걸려 도착한 '시드니 백팩커스(sydney backpackers)'라는 이름의 여행자 숙소는, 이름에 걸맞게 시티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었다. 기사님은 U턴이 허용되지 않는 거리를 과감하게 꺾어 골목으로 들어서며 목적지에 당도했다;
7 wilmot St, Sydney, NSW 2000
사실 처음 왔을 땐 이게 도시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지도 알 겨를이 없었다. 그저 에이전시에서 적당한 가격선에서 좋은 위치에 자리 잡은 곳을 잡아줬다는 말만 철썩같이 믿어야 했다 --; 뭐 돌이켜보면 에이전시에서 해준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숙박비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비쌌다는 것만 뺀다면. 사실 이 부분도 시티 내 백팩커의 평균 숙박비가 내 예측보다 큰 편이었으니 이 곳만 특출나게 비싼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시티 중심을 관통하는 조지스트릿(George Street)과 핏스트릿(Pitt Street)의 중간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으니, 도심 어디를 둘러보든 출발점이 결코 나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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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 들어서니 오른쪽에 조그마한 리셉션(reception)이 있었다. 졸린 표정을 하고 있던 직원이 내가 다가오자 반갑게 웃음으로 맞이해준다. 중국계 아시아인으로 보였다.
"어떻게 오셨나요?"
"어, 음, 아마 오늘자에 내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을겁니다. 확인해주시겠어요?"
"여권 좀 주시겠나요."
"네."
"음... 네 여기 있네요. 오늘부터 27일까지 2박 3일. 에이전시를 통해 예약하셨군요."
예약된 방은 16인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방이자 가장 저렴한 방이기도 했다. 이 방의 하룻밤 숙박비는 $26. 참고로 현재 호주달러와 미국달러 환율은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1=A$1.2 정도.. 특히나 시드니는 국내나 세계적으로나 물가가 비싼 도시로 유명하다. 여튼, 생각보다 비싼 금액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처음 듣기로는 $20 전후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한 번의 반전이 있었다.
"에, 사실, 에이전시를 통해 예약을 하셨기 때문에, 에.. 할인이 적용됩니다. (오 진짜요?) 네네, 다만... 안에 머무르는 여행객들이 물어보면 (가격표를 가리키며) 여기 나와있는 가격대로 말씀해주세요. 컴플레인이 들어올 수도 있기 때문에요. 아셨죠?"
알고보니 유학원과 모종의 거래라도 맺은 듯했다. 생각해보면 나쁜 일은 아니다. 백팩커 입장에서는 할인을 제시함으로서 안정적으로 처음 오는 여행객/유학생들을 확보할 수 있고 또 유학원 입장에서도 보다 안전하다고 큰소리 칠만한 여건을 마련하니 말이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키 보증금(key deposit) $30까지 지불하고 나서야 모든 절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디포짓은 체크아웃 때 돌려받는다. 다만 그 전에 잃어버리면 받을 수 없고 별도의 추가금을 변상해야만 한다) 피곤해보이는 나를 위해 그는 현재 한 명만 묵고 있다는 조용한 방을 배정해 주었다.
방에는 정말 한 명만 있었다. 중년의 서양 아저씨였는데, 국적이 기억나지 않는걸로 봐선 처음 들어보는 나라였던 것 같다. (그게 아니면 별로 중요하지 않았거나... 사실 이 부분이 더 말이 되는 것 같다) 비오는 창 밖을 바라보며 명상을 즐기는 모습을 보니 말을 거는 게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사실 이 아저씨는 불과 몇시간 후에 체크아웃 했다) 2층 침대 8개, 개인용 락커, 냉장고, 티비 하나. 방은 꽉 차 있었다. 어차피 2박3일 뿐이었던지라 짐을 푸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기에 일단 두다리 쭉 펴고 자리에 누웠다.
지도를 펼쳐놓고 뭐부터 해야하나 곰곰이 생각하다가 일단 집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백팩커 숙박비를 알고 나니 오래 묵기에는 부담스러웠다. 3일 안에 집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랩탑을 키니 아뿔사 배터리가 없다. 충전을 하려고 하니 이게 웬걸 콘센트가 듣도 보도 못한 생김새다.
240V의 호주 콘센트(위), 어댑터(아래)
보통 국산 전자제품 무리없이 사용 가능하다
혹시 모르니 한번 쯤 확인해도 좋다
일단 어댑터부터 사야겠다는 생각에 백팩커 밖으로 나왔다. 마침 배도 슬슬 고파질 참이었다. 헌데 리셉션에 물어보니 바로 옆 핏스트릿에 한인 상점이 꽤 있다는 것이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핏스트릿 그 중에서도 타운 홀(Town Hall)부터 센트럴 역(Central Station) 사이는 시티 안에서 한인 상점/식당이 몰려 있는 거리였다. 가장 가까이 있던 가게에 가서 어댑터 3개를 구매했다. 랩탑용 휴대폰용 기타 여분 하나. 1개에 3달러. 뜨악 비싸다... 별수 있나, 사야지. 게다가 빗줄기도 점점 거세져서 우산을 하나 사려 하니 쓸만한 게 9달러를 훌쩍 넘는다. 그나마도 조그마한 것들이다. 결국 가게를 나와 좀 더 내려가 찾은 현지 편의점에서 2불짜리 저렴한 우산을 구매했다. 저렴한 값을 하는 우산이었다. 한달 후 쯤에 두번째 썼을 때 바람에 휙 꺾어져 버렸으니깐.
사실 다시 저 때로 돌아가라면 저 어댑터는 결코 사지 않았을 것이다. 사진에선 잘 안 보이지만 두께가 약 2-3cm 사이인데, 너무 두껍다보니 콘센트에 꽂아도 힘이 없어서 덜렁거리기 일쑤다. 특히 아이폰 충전기나 맥북 충전기를 연결하면 언제 콘센트에서 빠질지 몰라 불안하기 그지없다. 3달러짜리 치곤 퀄리티가 너무 안좋았다. 나중에 보니 울월스 같은 곳에서 더 좋은 퀄리티의 어댑터를 팔고 있었다. 하나에 8달러 정도... 애초에 안 샀으면 몰라도 이미 이걸 사버렸으니 또 사기도 뭣하다. 미리 여행자용 어댑터를 사가지고 올걸. 아니면 애초에 돈을 더 주더라도 좋은 걸 샀어야 했는데... 호주 와서 처음으로 후회한 것 중 하나였다. 급한 마음에 일단 보이는대로 사다보니 이리 된 꼴이다.
*
무선 인터넷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아니 몹시 안 좋았다 --; 층마다 무선인터넷이 지원되긴 했는데, 접속이 영 불량이었다. 랩탑은 처음엔 아예 연결이 안되어서 1시간 넘게 두드린 끝에 겨우 접속할 수 있었다. 여튼 노력 끝에 호주의 한인 커뮤니티를 검색해 들어갔다. 필리핀에서 워킹을 갔다 온 친구들에게 들은 '호주나라'라는 사이트였다. 호주나라는 가장 큰 호주 한인 커뮤니티 중 하나로, 부동산 구인구직 등 다양한 정보들을 소개하고 공유하는 곳인데, 특히 뉴 사우스 웨일즈(New South Wales, NSW)나 퀸즐랜드(Queensland, QL), 빅토리아(Victoria, VC) 등 동부권 한인들을 위한 정보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내가 도착한 시드니(Sydney, NSW에 속해 있다) 관련한 구인구직/룸쉐어 정보가 굉장히 많은 편이다.
하지만 집을 구하는 일이 생각보다 신통치 않았다. 왜냐하면 연말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부터 1월 초중반까지는 방을 구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유학생은 차치하고서라도 호주의 연말을 즐기기 위해 전세계 각국의 여행객들이 오는 시즌이 바로 이 때라고 했다. 특히 중장기로 여행을 오는 여행객들의 경우 호텔 대신 아예 룸쉐어를 구해 지내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이말인즉슨 내가 오기 한참 전에 이미 많은 방들의 주인이 결정되었다는 것이었다 ==; 급한대로 단기, 1주일 정도라도 머물 수 있는 집을 구한 후 슬슬 집을 찾아볼까 했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단기는 단기 나름대로 이미 집이 나간 후였고 더더군다나 성수기랍시고 방값을 더블로 올려 받고 있었다. 시발 사기꾼 넘들...
무엇보다 난감했던 건 게시판에 나와 있는 연락처에 연락을 할 방법이 없었다는 거다. 25일은 크리스마스, 휴일이었다. 특히나 호주에서 크리스마스는 가족들과 보내는 게 일반적이라 이 날 모든 상점은 평소보다도 빨리 문을 닫곤 했다. 평소에도 9시 즈음에 문을 닫는 곳이 이 나라인데, 하물며 크리스마스는... 그나마 픽업 기사분과 연락했을 때처럼 카카오톡으로 전화번호를 동기화시켜 연락을 취하기도 했으나, 직접 전화를 해서 문의해보는 것과 비교하면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었다. 눈물겨운 노력 끝에 서너군데 연락을 취해 다음날 집을 둘러보기로 약속 시간을 잡을 수 있었지만 점점 걱정이 앞서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더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불안해봤자 남는 건 하나도 없다. 최대한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마음먹고 컴퓨터를 닫아버렸다. 좀 쉬어야 했다. 졸렸다.
하지만 그마저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하루였다.
*
유일했던 룸메이트 아저씨가 떠나기 한두시간 전, 훤칠한 장신에 금발을 한 남녀 커플이 방에 들어왔다. 그들은 네덜란드인으로, 6개월 째 전세계를 유랑 중인 커플이라고 했다. 남자는 잘생겼고 여자는 몹시 미인이었다. 눈길이 갔지만 방을 알아보기에 급급했던 나는 인사와 통성명만 건네고 다시 컴퓨터 모니터에 집중해야 했다. 네덜란드 커플 역시 피곤했는지 곧장 짐을 풀고 자리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헌데 좁은 2층 침대 아랫칸에 둘이 살을 맞대고 나란히 눕는 게 아닌가. 뭐, 커플이었고, 사실 커플이든 아니든 내가 알바 아니었다. 문제는 오후 8시 넘어 해가 지자 방 안에 묘한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살을 맞대고 쉬고 있던 두 커플은 자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 안에서 나는 저들에게서 무언의 압박 비슷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야릇미묘한 압박감에 결국 나는 방을 박차고 나와야만 했다. 그리고 두시간 넘게 시드니의 밤거리를 홀로 거닐어야 했다... 누구 좋으라고 뭣하는 짓인지... T^T
조지스트릿에 있는 루이비통 매장(위)과 시티 카운슬(아래)
마실 나온 시드니 시내의 밤은 고요했다.
아마 크리스마스라 더 그랬을 것이다.
카운슬 건물은 조명 효과를 줘서 화려하게 옷을 입었다 :)
11시 좀 안 되어 방에 돌아갔을 때, 나는 처음 통성명했을 때보다 더 밝은 모습으로 "where did you go?"라고 인사를 건네는 네덜란드 커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좋았냐. 좋았겠지. 내 덕인줄 알아 이것들아... 아흐 호주 12월은 여름이라더만 그날 거리는 뭐그리 추웠나 모르겠다. 하루종일 보슬보슬 내리는 비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그렇게 첫날밤이 지났다.
아, 그리고 그날 크리스마스라 자기 전에 다운받아 놓은 영화 한편 보고 잤다.
[Home Alone]. 한국판 제목은 [나홀로 집에]
블루레이 고화질 스크린으로 아주 만족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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