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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Road

[D+0] :: 시작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필리핀 세부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세부에서의 생활에 대해서는 차후 별도로 다시 포스트하겠지만, 3개월 동안 생각 이상으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렇게 새로운 인연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달 두달 지내면서 하나 둘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져야 했다. 누구는 한국 누구는 시드니, 벤쿠버... 다들 각자의 길로 떠났고,  자연스럽게 내 차례를 맞이했다. 내가 갈 때가 됐을 땐, 항상 함께 다니던 친구들은 모두 떠난 후였다.


  그 중 유일하게 마지막까지 함께 있던 재일교포 4세 유키(김용수라는 정겨운 한국 이름이 있다) 는 하루 일찍 시드니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우리는 그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사실 이 친구와 관련하여 시드니행 비행기에 대해 할 얘기가 많지만 그 역시 차후에 세부생활 포스트에서)


  마지막으로 머무른 학원 인근의 세부R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한 후, 학원 앞 맥도날드로 가 점심을 먹고 하릴없이 두세시간 앉아 스마트폰을 만지작만지작.(사실 할 게 없었다 시간도 애매해서 딱히 갈 곳도 없었고) 맥도날드를 나와 옆에 위치한 세븐일레븐 편의점에서 우연히 하루카를 다시 만났다. 그게 필리핀에서의 인연을 맺은 친구와의 마지막 인사였다. 뭐, 이미 작별인사는 전날 이미 많이 해서 큰 감흥은 없었지만.

윌리엄 바 william Bar

학원에서 큰길로 나오면 보이는 첫 술집

사실 필리핀 술집 중에서 싼 축은 아니어서 뒤쪽에 있는 아프라도 Afrado 를 더 자주 갔다.

출발 전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50분쯤 걸렸던가... 오후 2시 넘어 세부막탄공항에 도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가지고 온 미니 기타를 기내에 가지고 탈 수 있는지 체크인 때 물어보려고 좀 일찍 온 것이었다. 맨 처음 가서 사정하면 뭐라도 될 것 같아서... 게다가 캐리어 무게가 규정 무게인 23kg를 초과해서 추가요금도 은근히 신경쓰이던 참이었다.


  문제는 너무 일찍 오는 바람에... 케세이퍼시픽 체크인 리셉션(reception)이 아예 열리지도 않았다는 것. 체크인은 보딩(boarding; 탑승) 3시간 전부터 시작이라, 그 때까지 하릴없이 앉아 기다려야 했다. 항공사 직원들 사이에 멀뚱멀뚱 앉아있다가, 결국 당당하게 쭈구려 앉아 벽의 콘센트에 아이폰 충전기를 연결하고 <이터널 선샤인>을 보게 되었다. 1시간이나 흘렀을까, 항공사 직원으로 보이는 아저씨 두분이 나에게 와서 말을 걸기 시작했다. 필리핀엔 얼마동안 있었느냐, 왜 왔느냐, 여행은 많이 다녔느냐... 솔직히 영화에 집중하고 있던 참이라 좀 번거롭기도 했으나 나 역시 심심하던 차였기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미니 기타에 관심을 보이던 직원이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이내 물었다.

  "근데 19:55 비행기라면서 왜이리 빨리 온거야? 아직 3시도 안됐는데."
  "사실 이 여행용 기타를 기내에 들고 탈 수 있는지 알 수 없어서, 체크인 할 때 물어보고 가능하게끔 부탁해보려고 일찍 왔어. 필리핀 영어 선생들이 일찍 와서 이야기해보면 잘 될 확률이 높다고 했거든. 게다가 캐리어 무게가 규정 무게를 초과해서 추가 요금도 물어봐야 했고."
  "오 그래? 이거, 다른 기타보다 좀 작아보이는데, 애들용(kids)이야?"
  "응, 여행자용(for traveller)이기도 해. 너도 알겠지만 기타를 캐리어랑 같이 포장해서 보내면 부서질 수도 있잖아. 그래서 가지고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려고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어. 확실하질 않네."
  "으하하! 그렇다면 넌 걱정할 필요가 없어. 이게 애들용이라면 아마 충분히 가지고 들어갈 수 있을거야. 그리고 사실 난 니가 탈 비행기의 수하물 무게를 책정하는 책임자(I'm in charge)거든... 네 캐리어 무게에 대해선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 내가 통과되도록 도와줄게.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지져스. 진짜야?"
  "당연하지. 네 캐리어가 지금 얼마나 초과한다고 했지? 저기 기계에 대고 한 번 재봐. (5kg 초과 돼) 음 좋아 그러면, 3kg만 빼서 네 백팩에 옮겨 담아. 그 정도면 문제 없어. 네 가방에 내 서명이 적힌 태그를 붙여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패스될 수 있을거야."
  "오... 진짜 진짜 고마워! 이것 때문에 정말 고민이 많았거든."
  "하하, 크리스마스 이브잖아. 필리핀에서의 생활이 즐거웠기를 바래!"

  그놈의 인연이란게 뭔지. 가볍게 흘려보낼 법 했던 잠깐의 대화가 나에겐 로또였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도움으로 나는 아무런 추가요금 없이 캐리어를 고스란히 수하물로 넘겨보낼 수 있었다.(초과요금이 10만원 정도 될까 노심초사했던 참이었으니!) 게다가 미니기타 또한 "for kids" 사이즈임을 확인한 후 무사 통과되며 기내로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다. 야호! 공항을 자주 이용해본 분들이라면 알겠지만, 공항에서 직접 캐리어에 대한 초과무게 요금을 납부할 경우 kg당 한화로 1-2만원 이상을 납부해야 한다. 어느 나라던지 예외는 거의 두지 않으며, 저가항공사일수록 더더욱 엄격하게 무게를 책정한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막탄세부공항 역시 초과된 무게에 대해 상당한 금액이 부과되기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운좋게도 모두 무료로 통과되다니! 나는 그렇게 필리핀에서의 마지막을 기분 좋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쌩유 필리핀!

  그렇게 5시부터 시작된 체크인을 거쳐, 저녁 7시 55분, 캐세이퍼시픽(Cathay Pacific Airways) CX920 편 홍콩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홍콩으로 향했다. 시드니로 향하는 첫 걸음이었다.



  정확히 2시간 40분 후 홍콩에 도착했다. 이미 세부에 올 때도 한번 경유했던 공항이라 낯설진 않았다. 홍콩 국제 공항(HKG)은 인천 공항 못지 않게 굉장히 세련되고 잘 갖추어진 공항 중 하나다. 무엇보다 굉장히 '긴' 공항이라 보딩 게이트(Boarding Gate)를 찾는데 고생 좀 해야 한다는 게 특징이다. 실제로 한시간의 대기 시간 중에 너무 여유 부리다가 게이트를 제대로 못찾아서 진땀을 빼야했다. 다행히 비행기에 탑승하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서 있어서 늦지 않게 들어갈 수 있었지만. 뭣보다 와이파이가 공항 곳곳에서 정말 빵빵하게 잘 터진다... 가족들과 아이폰으로 페이스타임(Facetime; iOS용 화상 통화 애플리케이션)을 하는데 큰 불편함이 없었다. 필리핀에서의 와이파이만 생각하면... 어휴.


  캐세이퍼시픽은 홍콩에 본사를 둔 항공사이기에 보통 경유를 하려 하면 홍콩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사실 그건 우리 입장인거고, 캐세이퍼시픽 입장에선 모든 비행기가 집(홍콩)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그러니 거기서 다른 곳으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타서 가는 셈... 사실 다른 항공사를 찾아봤다면 세부-시드니 직항도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티켓 구매 당시 무조건 저렴한 가격을 고려해야 했기에 경유의 번거로움은 어느 정도 감내해야 했다. 세부에 갈 때에도 인천-타이페이-홍콩(환승)-세부 10시간이었으니. 여튼 대기 시간 동안 가족들 및 친구들에게 연락을 취한 후 곧장 23:55 시드니행 CX101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71번 환승 게이트

환승 게이트는 일반 탑승 게이트랑 층수가 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드니 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



  자리에 앉고 나니 그제야 긴장이 모두 풀렸다. 이젠 시드니까지 발뻗고 가기만 하면 된다. 사실 발을 뻗기는커녕 오만가지 걱정 때문에 잠도 오지 않을 지경이었지만 여튼 비행기와 관련해 더 이상 신경쓸 건 없었다. 알겠지만 비행기를 탄다는 일 자체가 생각보다 준비할 것도 많고 신경쓸 부분들이 많아서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곤 하니까. 옆에는 긴 곱슬머리의 순해 보이는 백형이 앉아 담요 속에 얼굴만 내민 채 <어매이징 스파이더맨>을 보기 시작했고, 나 역시 각 좌석에 설치된 스크린을 통해 오디오 및 비디오 서비스를 돌려보았다. 유일하게 서비스되는 한국어 관련 비디오 서비스는 영화 <도둑들>이었다. 임달화가 나와서인지, 중국에서 유명하다던 전지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개봉 당시에도 보지 않았던 영화였기에 궁금함을 가지고 보았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재미는 별로 없었다. 캐릭터가 살아있고 스타일리쉬한 건 알겠는데 천만 관객이 들만한 영화인지는 잘 모르겠음. 각자의 가치 판단문제)


  9시간 20분은 생각보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가만히 앉아 있기에 지루한 것 또한 사실이다. 게다가 뒷자리의 여자분과 앞자리의 아이를 안은 중국인 아주머니 때문에 의자 한번 맘껏 펼치지 못하고 잠들 수밖에 없었다. (반면 옆자리 백형은 앞뒤가 모두 공석이었기에, 고무줄 늘리듯 몸을 늘리고 퍼잘 수 있었다. 이기적인 새키...) 그나마, 오디오 서비스 카테고리 중에 90년대 록넘버 및 최신 팝송들을 나름 선곡해 들으며 시간을 죽여갔고, 억지로나마 쪽잠을 잔 끝에 9시간에 걸친 비행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리고, 시드니에 도착했다.